[그란폰도 출전기2]폭염주의보 내린날 설악산 208㎞를 달리다.
평소와는 좀 다른 월요일이다. 오늘 아침 5시반 눈이 떠졌다. 열시간은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5시간쯤 잤나. 어제의 흥분이, 에너지가 가라앉지 않은 듯 잔열이 남아 얼굴이 화끈한 느낌. 그리고 나쁘지만은 않은 피로감. 서울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난 22일. 나는 수천명의 라이더들과 설악산을 달렸다. '2016 자이언트 설악 그란폰도', 거리 208㎞, 총합 3500m 상승고도의 길을 12시간 안에 달려야 하는 대회다. 구룡령(7㎞, 역방향 21㎞), 조침령(4㎞), 필례한계령(5㎞) 등 큼직한 고개를 여럿 넘는다. 아마추어 자전거인들의 '끝판왕' 대회라 불린다. *'2016 자이언트 설악 그란폰도' 코스© News1 길게는 올봄 본격적인 자전거 시즌 시작부터, 짧게 일주일전부터 이날을 준비했다. 일주일을 앞둔 지난주 일요일 적당히 높은 산을 오르며 100㎞를 전력질주했다. 그리고 대회 이틀 전인 금요일까지 닷새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균 30㎞를 짬짬이 달렸다. 토요일엔 쉬엄쉬엄 대회 큐시트(세부코스와 예상소요시간 등을 정리한 일정표)와 중간에 먹을거리, 준비물 등을 챙기며 하루를 보냈다. 좋아하는 술을 일주일 동안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과연 208㎞를 달릴 수 있을까. 올해 가장 많이 달린 게 150㎞, 오른 고도는 1500m인데 완주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 반, 이 악물고 달리면 되지 하는 근거없는 자신감 반. 결전의 날. 새벽 3시 버스를 타기 위해 2시에 눈을 떴다. 전날밤 11시쯤 겨우 잠을 청했는데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자전거와 짐을 챙기고 버스가 있는 반포한강공원으로 달려가는데 벌써 흥분된다. 아, 오늘 잘 타야 하는데…. 사고없이 무탈하게 완주만 하자고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란폰도(Granfondo)는 경쟁을 통해 순위를 매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한시간 내 완주를 목표로 하는 대회다. '긴 거리 또는 위대한 인내'라는 뜻 답게 라이더들은 실력에 무관하게 극한 코스에서 자기 자신과 싸운다. 내 첫 그란폰도는 지난해 10월 열린 백두대간 그란폰도였다. 출전권을 아는 사람에게 양도받고 얼떨결에 나가 120㎞코스(6시간 제한, 상승고도 2500m)를 30초 남기고 '컷인'했다. 백두대간도 만만치 않지만 설악 그란폰도에 비하면 쉽다. 설악은 코스의 길이나 상승고도가 훨씬 사악하다. 내 이름으로 나가는 첫 대회라니 설렘과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대회 시작 시간은 아침 7시. 버스에서 한시간 반 전에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식은 음식을 꼭꼭 씹으면서 든든히 먹고 잘 타자고. 낮엔 33도까지 올라갈 만큼 덥지만 강원 산간지방의 아침은 매우 추웠다. 덜덜 떨면서 긴 줄에 서 몸에 달 배번을 받고 옷매무새를 갖추고 바짝 긴장해 출발선에 선다. 이날 2300명이 출전했다고 한다. 초여름 새벽 낯선 곳에서 제각기 전의를 불태우는 거대한 무리들.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만 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공기가 팽팽하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 여기저기서 "딸칵" "삐". 수천명이 몇초 사이로 자전거에 클릿을 끼우고, 자전거에 붙은 칩이 출발선을 지나며 내는 소리가 무척 경쾌하다. 정말 대회구나. 찌릿하다. 긴장감을 안고 몸을 풀면서 천천히 페달을 굴린다. 한시간 반쯤 완만한 언덕과 내리막길, 평지를 섞어 달리니 첫번째 령(嶺)이 나타난다. 해발 1013m 구룡령(6.8㎞, 평균경사 6%) 시작이다. 한번 오른 적 있고 초반에 힘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살랑 살랑 올라간다. 아침 9시인데도 볕이 뜨겁다. 중간쯤 오니 땀이 자전거 위로 떨어진다. *구룡령 정상© News1 정상에 1차 보급소가 마련돼 있는데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같이 타기로 한다. 신난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은 자전거를 탈 때 반은 틀린 말이다. 빨리,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구룡령 다운힐은 무려 21㎞다. 급격한 헤어핀(급격한 커브 구간)이 꽤 있지만 정말 신나는 내리막이다. 하지만 다시 이곳을 통해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이 엄청난 내리막을 거꾸로 올라와야 한다. 그걸 생각하니 신나지만은 않다. 150㎞를 달려 털린 다리로 여길 올라야 한다니. 끔찍하지만 일단 즐기기로 한다. 땀이 완전히 식고 춥기까지 하다. 한참을 신나게 내려오니 바로 조침령(4㎞, 10%)이 시작된다. 구룡령 내리막의 끝에서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을 하니 떡하니 벽이 서있다. 평균 경사도가 10%에 달하는 극악무도한 업힐이다. 몇몇이 댄싱으로 힘겹게 시작점을 오르고 있다. 자전거와 사람이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일만큼 가파르다. 초입부터 앉아서 쉬거나 끌바(자전거에 내려 끌고 가는 것) 행렬이 상당하다. 왼발, 오른발에 맞춰 하나둘, 하나둘 리듬을 맞춰 천천히 올라간다. 순간 경사도 13~14% 구간이 꽤 되는데 날씨는 더 더워져서 얼굴에 소금이 나오기 시작했다. 땀이 말라 나온 진짜 소금이다. 인간의 염전화. 힘들게 오른 조침령 정상엔 에어컨이 있다. 큰 터널 안이 자연 에어컨이다. 잠시 몸을 식히고 에너지바를 먹고 다시 힘을 내 앞으로 향한다. 일행이 생기니 잠시 안장 위에서 얘기도 나누고 재밌다. 얼마나 남았는지 이번 업힐은 몇㎞인지. 큐시트대로 잘 가고 있는지. 그러면서 딱 절반 지점 원진개(104㎞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대회 시작 전 맡겨둔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주최 측이 제공하는 바나나와 음료도 마음껏 먹는다. 잠시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너무 더워서 잘 먹히지 않지만 그래도 그늘에 앉아 배를 채우고 시원한 음료로 땀을 식히니 조금 낫다. 104㎞가 남았는데 이제부터 시작이다. 근데 날씨가 너무 덥고 해가 무서울 지경이다. 큰 오르막이 두개나 남아 있다. 한계령은 초반은 잔잔하다가 갈수록 기울기가 심해진다. 게다가 그늘이 거의 없다. 아주 작은 그늘이라도 지나면 잠시 시원해지는데 덥고 또 덥다. 앞서 가는 라이더들이 아지랑이 속을 기어간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온몸을 내리쬐고 검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하체를 달군다. 바닥만 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때론 앞을 모르는 게 더 낫다. 눈앞에 극한 경사를 보고 나면 겁먹고 클릿을 빼고 싶다. 그래서 바닥을 본다. 땀을 한바가지 쏟고 거의 한계령 정상쯤 왔을까. 잠깐 눈을 돌리니 울창한 나무와 깊은 골짜기, 설악의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내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정상에 올라 인증샷을 하나 찍었다. 그리고 신나는 내리막을 아찔할 만큼의 속도로 내려간다. 잠깐씩 속도계를 보니 시속 50~60㎞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최고 속도는 72㎞/h다. 내리막이 있으면 다시 올라야 하는 법. 한계령을 내려와 좀 달리면 설악 그란폰도의 하이라이트, 드디어 구룡령 역방향 업힐이 시작된다. 21㎞(4%) 오르막을 가야 한다. 시작점에 반가운 보급소가 있다. 바나나와 시리얼바로 당을 보충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오르기 시작한다. 중간에 힘을 내기 위해 고(高) 카페인 에너지젤을 먹었다. 부작용인지 계속 심장이 저릿하며 두근거린다. 끌바는 물론 그늘에 누워 자는 사람도 많다. 얼마나 단 잠일까, 나도 내려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겨우 이기고 계속 페달을 굴린다. 정말 지겹도록 한발 한발 밟는다. 한번도 내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그렇게 다시 오른 구룡령 정상. 감동이고 뭐고 그냥 힘들다. 이제 골라인까지 44㎞를 더 달리면 된다. 한시간 반 정도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10㎞쯤 달렸을까, 일행이 쥐가 나서 먼저 가라고 한다. 어쩔 수 없다. 남은 30여㎞는 혼자 달리기로 한다. 혼자 달리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간다. 남자들의 뒷태에 소금이 가득하다. 검정색 저지는 물론 바지에도 흰색 소금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힘든 와중에도 그걸 보고 살짝 웃는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라이더들을 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깊은 골짜기 속 우거진 초록, 뻥 뚫긴 도로 옆엔 계곡물이 흐른다. 정신없이 달리는 중 눈에 들어온 아름다운 풍광에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어본다. 이 기분을 기억하고 싶어 핸드폰을 꺼내 풍경을 한장 찍어둔다. 마지막 10㎞ 정도는 팩(무리)을 잡아 달렸다. 10명 정도 되는 무리가 추월하길래 전력으로 따라가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하나같이 막판 스퍼트 중이다. 혼자도 좋지만 같이 달리니 더 좋다. 남은 거리 5, 3, 1㎞ 숫자가 줄어드는 표지판을 순식간에 지나친다. 곧 웅성거리는 대회장의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감격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 골라인을 앞에 두고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잘 달리시네요" 진심이 담긴 격려의 말을 주고 받는다. 그냥 뭉클하다. 힘들지만 가슴이 뻐근하다. 이게 그란폰도의 묘미구나. 다들 얼마나 힘들었을지, 몇번이나 안장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페달을 굴렸을지 알기에 감격으로 뭉클하다. 미친듯이 페달을 밟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왜 자전거를 타는가. 왜 이렇게까지 타는가. 나도 1년전, 그러니 사이클을 진지하게 타기 전에 한계령을 차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으로 올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주 내내 피곤하게 일하고 쉬는 날도 몸을 혹사시켜야 하다니 왜. 가만히 있어도 찜통인 날 팔다리를 시커멓게 그을려가면서 말이다. 달리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 난 뒤에 얻는 것들이 있다. 우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된다. 그리고 겸손해진다. 삶에 조금 더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 그리고 안장 위에서 보는 풍경들이 좋다. 달리면서 보는 자연, 삶의 모습들, 코끝을 스치는 냄새 그런 것들 말이다. 설악을 완주하고 나는 달라진 것일까. 물론이다. 설악 그란폰도 전의 나와 후의 나는 다르다. 그 전의 나도 좋지만 극한 코스를 달리고 난 내가 더 좋다. 한가지 목표를 위해 세심히 몸과 마음을 돌본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엘리트 선수가 아니다. 일을 해야 하고 생활이 있다. 그것들과 아슬아슬 줄을 타면서 한가지 목표에 열중한다. 그리고 대단치 않지만 그것을 해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말이다. *기자가 받은 완주증 설악 그란폰도 같은 대회를 뛰고 나면 당분간 자전거는, 대회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어김없이 한해 대회 일정표를 또 기웃거린다고 한다. 완주증에 적힌 기록은 10시간 49분24초11, 스마트폰 어플이 기록한 평속은 22.4km/h, 순수하게 달린 시간은 9시간이 조금 넘는다. 내년 기록이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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